동북아 역사전쟁2014. 1. 3. 13:36


아래는 월간 『개벽』 2014년 1월호 122쪽에 실린 상생문화연구소 김현일 박사님의 글입니다.


1. 임나일본부 주장의 두 가지 사료근거

임나일본부설은 19세기 후반 일본에서 정한론이 대두되었을 때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한국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통치할 역사적 근거를 임나일본부설에서 구성하였다. 임나일본부설이란 당시 일본의 통일국가인 야마토(大和) 조정이 4세기 중반에서 6세기 중반까지 약 200년간 한반도 남부의 임나를 직접 지배했고, 이를 기반으로 백제와 신라를 간접 지배했는데 그 지배기구가 바로 임나일본부라는 주장이다.

* 일본의 고대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임나일본부가 나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일본 천황가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개변하고 윤색하였다는 것은 모든 학자들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 일본인들이 임나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주장하는 또 하나의 주요한 사료적 근거는 광개토대왕 비문이다. 이 비문에는 한반도에 왜병이 다수 파견되어 잇었으며 이를 광개토대왕이 군대를 파견하여 격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제 사료를 통해 임나일본보의 실제체 접근해 보자.



2. 임나는 가야에 대한 총칭

* 우리나라 기록에도 임나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데 가장 이른 기록이 앞에서 언급한 광개토대왕 비문이다.
* 그 외에도 신라 문무왕때의 문장가 강수의 전기를 실은 『삼국사기』「강수전」에는 강수가 '임나가랑任那加良'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며, 신라말의 「진경대사탑비」에도 진경대사가 임나왕족의 후손이라 하면서 그 선조가 김유신이었다고 한다. 주지하다시피 김유신은 김수로 왕이 세운 가락국 즉 금관가야 사람이다. 그러므로 임나는 금관가야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그런데 『일본서기』긴메이 천황기에 신라기 임나의 관가를 쳐서 멸망시켰다는 언급을 하면서 그 주에 "통틀어 임나라 하고 세분해서는 가야국, 안라국, 사이기국, 다라국, 졸마국, 고차국, 자타국, 산반하국, 걸찬국, 염례국 합해서 10국이다."라는 중요한 기록이 덧붙여져 있다. 임나가 가야를 통틀어 일컫는 지명으로 사용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 외에 『일본서기』에서 나오는 임나는 특정한 가야를 말하는 것으로 김해가야(금관가야)를 지칭한다. 김해가야가 가야연맹을 주도하던 나라라서 임나가 가야에 대한 총칭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물론 예외적으로 고령가야를 지칭하는 경우도 더러 보이는데 이는 금관가야는 4세기 초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약화된 뒤 고령의 대가야가 가야연맹을 주도하게 되면서 고령가야를 가야를 대표하는 대가야로 부르다보니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3. 『일본서기』 신공황후의 신라정벌은 거짓

기록에 따르면 신공황후는 추아이仲哀 천황의 비妃로서 남편이 죽은 후 69년 동안 섭정을 한 여인이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재위기간이 201~269년이지만 『일본서기』가 이 시기의 연대를 의도적으로 2주갑周甲 올리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321~369년이 그 섭정기간이 될 것이다.
『일본서기』는 추아이 천황이 신이 명한 신라정버를 거부했기 때문에 신벌을 받아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후는 남편이 죽자 임신한 몸으로 곧 바로 신라정벌에 착수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정벌 기사는 전설 같은 이야기로 일관되어 있어 현실 사건을 기술했다고 보이지 않는다. 그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겨울 10월 3일 화이진에서 출발하엿다. 때에 풍신風神이 바람을 일으키고 해신이 파도를 일으켜 바닷속의 큰 물고기들이 다 떠올라 배를 도왔다. 바람은 순풍이 불어 범선은 파도에 따라 나아갔다. 노를 쓸 필요없이 곧바로 신라에 이르렀다. 그때 배에 따른 파도가 멀리 나라 안까지 미쳤다. 이로써 천신지기天神地氣가 모두 도와준 것을 알았다.
신라왕은 전율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러 사람을 모아서 '신라 건국 이래 아직 바닷물이 나라 안에까지 올라온 일을 듣지 못하엿다. 천운이 다하여 나라가 바다가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군이 바다를 메우고 깃발들이 해에 빛나고 북과 피리소리가 산천에 울렸다. 신라왕은 멀리 바라보고 생각 밖의 군사들이 자기 나라를 멸망시키려 한다고 생각하였다. 두려워 싸울 마음을 잃었다. - 『일본서기』


이 뒤에는 신라왕이 일본을 상전으로 모시고 해마다 빠짐없이 조공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한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당시 신라 왕의 이름을 파사매금婆娑寐錦이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신라의 5대 왕인 파사왕(파사이사금)은 재위 연도가 80~112년으로 신공황후 시대보다 250년 이전의 사람이다. 『일본서기』의 이 기록은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가공의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삼한이 천황가의 직할영토라고 지적
『일본서기』는 계속해서 전설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다. 고구려, 백제 두 나라 왕이 신라가 항복했다는 것을 듣고는 스스로 군영으로 찾아와 머리를 조아리고 일본의 번국番國으로서 조공을 그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한다. 그래서 신공황후는 '내관가둔창內官家屯倉'을 정하였는데 이것을 삼한三韓이라 하였다. 내관가둔창은 천황가의 직할 영토라는 뜻이다. 『일본서기』는 삼한이 천황가의 영토라는 엄청난 역사왜곡을 자행한 것이다. 『일본서기』 신공황후기에 실린 신라정벌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를 현재 일본학계에서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 다음 포스팅에서 계속
Posted by 알아야산다구